벤예후다 -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다 분류없음2009-05-15 19:23:01
울판(Ulpan) : Hebrew Language Course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를 배운다면?
엘리에젤 벤예후다 -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다

히브리어는 19세기까지 기도문 같은 종교적인 책 안에 갇혀 있었다. 히브리어를 일상의 언어로 살려낸 사람이 있다. 엘리에젤 벤예후다(1858-1922).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유대인 아이와 마찬가지로 종교교육을 받으며 히브리어를 습득했다. 가족들은 그가 랍비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의 관심은 당시 동유럽의 젊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가 아닌 일반 세상에 있었다.

벤예후다가 20세 되던 해에 발칸 반도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에 자극을 받아 유대인도 그들의 조상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도 다른 민족처럼 그들 조상의 땅과 언어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조상의 땅과 언어를 회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벤예후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팔레스타인 땅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878년 벤예후다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려면 의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폐결핵 때문에 벤예후다는 파리에서의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1881년 그 당시 터키가 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그는 여러 히브리어 잡지에 유대 민족, 그들의 땅과 언어의 르네상스에 대한 주제로 기고했다. 벤예후다는 히브리어
의 재생을 위해 세 가지 실천 목표를 정했다.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히브리어 단어, 단어, 단어"

벤예후다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해서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로 말하기를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는 히브리어로만 말하기로 결심했다. 벤예후다와 그의 부인은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만 말하는 첫 가정이 된 셈이다. 아들 이타말이 태어나자 히브리어로만 말을 가르쳤다. 벤예후다는 아들이 이스라엘 현대사에서 완전하게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첫 사람이 되도록 했다. 벤예후다는 아들이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듣지도 못하도록 했다. 만일 그의 집에 히브리어를 할 줄 모르는 방문객이 찾아 올 경우 그는 아들을 방으로 들여보낼 정도로 철저했다. 아버지의 이런 열심 때문에 아들 이타말은 4살이 되서야 뒤늦게 말문을 열게 되었다.

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벤예후다는 예루살렘의 알리앙스 학교에서 교사직을 제안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어린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쓸 수 있는 공통의 언어는 없었다. 벤예후다는 건강이 악화되어 오랜 기간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히브리어 교습은 성공적이었고 이것은 다른 교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히브리어를 가르칠 교재도 교육법도 숙련된 교사도 모두 부족했다.

벤예후다는 어른들이 히브리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신문 하쯔비를 1884년에 발행했다. 19세기말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전세계 유대인 남자의 50%는 구약의 모세오경과 기도문을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었다. 벤예후다가 만든 히브리어 신문은 히브리어가 종교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은 어려움 없이 히브리어 신문을 소화할 수 있었다. 신문은 새로운 히브리어 단어를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10년 벤예후다는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방대한 이 사전은 벤예후다의 사후 그의 부인과 아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벤예후다가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부활의 꿈은 당시 유대인 사회 분위기와 부합했기에 실현 가능했다. 벤예후다가 팔레스타인에 이민을 온 1881년은 초기 유대인 이민자의 물결이 시작되던 해 이기도 하다. 벤예후다와 같이 젊고 교육받은 이상주의자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유대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탈무드 학교에서 이디쉬로 공부하기를 원치 않았다.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예루살렘, 욥바, 리숀레찌온 등에 생겨났다. 팔레스타인에서 공통의 언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이민자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히브리어 사용을 확산시켰다. 이들의 노력으로 히브리어는 유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권을 갖고 있던 영국은 1922년 11월 29일 히브리어를 팔레스타인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그러나 한달 뒤 벤예후다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온주의자로 잘 알려진 헤르즐조차도 이스라엘의 독립 국가는 꿈꾸었지만 히브리어의 부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헤르즐은 그의 소책자 '유대국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어떤 체계를 갖게 될 것인지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국어에 관해서는 스위스의 예를 들면서 이스라엘도 이민온 유대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독어, 영어 등 몇 개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헤르즐은 정치적인 독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언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http://pdsisrael.com/board/zboard.php?id=board&no=122
개종한 유대인과 종교재판 분류없음2009-05-11 17:27:54
십자군 전쟁당시 유대인과 무슬림들은 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십자군의 표적이 되 어 무참하게 살해되기도 하였지만,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어 살아남은 유대인들도 상당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나 박해는 계속 되었 다. 특히 기독교국가를 이루고 있는 유럽지역에서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란 이유로 유대 인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다. 당국자들은 알수없는 크고 작은 재앙이 일어날 때 마다 유 대인들을 희생양으로 하여 대중의 분노를 유대인에게 돌이곤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흑사병)재앙이 였다.


1340년에 시작된 흑사병은 프랑스를 휩쓸었고, 1349년에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 육하여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 계속해서 1350년에는 유럽을 거쳐 아이스란드와 러시아 에 까지 번져갔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전체주민의 88퍼센트가 목숨을 잃었고, 파리에서 는 하루에 800명이 흑사병으로 죽어갔다. 이렇게 해서 1400년경 유럽 전체인구는 흑사병 발병 이전의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 되었다. 흑사병 발병의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 지만, 의학계에서는 몽골 기마병을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골기마병이 흑해 북 쪽에 있는 제노바의 무역기지 카파를 공격하여 3년간의 지루한 전투를 벌이던 몽골군 진영 에 페스트가 퍼젔다. 몽골군은 페스트로 죽어 부패해진 몽골군 시신들을 투석기에 담아 성 안으로 날려 보냈다. 성안에는 페스트가 변졌고, 성안에서 빠져나와 콘스탄티노플로 간 사 람들이 그곳에서 수천명의 시민들을 페스트로 사망하게 하였다. 페스트는 유럽과 동방지역 에 계속 확산되어 이슬람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어느날 갑자기 유대인들이 페스트를 퍼뜨렸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유대인들의 집들이 불 태워지고 살해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의 마을은 페허가 되 었고 유대인들은 사라져 갔다. 유대인들에 대한 나뿐소문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유대인들 은 유월절에 기독교 어린이들을 납치해서 어린이 피로 유월절 행사를 치른다는 터무니없 는 소문을 퍼뜨려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폭동을 이르키고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불길한 일 이 일어날때마다 그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를 받은 존재로 여기면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사는 것을 꺼리는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 다. 지방 영주들은 유대인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특별한 옷을 고안해서 입게 하거나 어 떤 표시를 만들어 가슴에 달고 다니게 하였다. 나중에는 게토라 불리는 제한된 구역에서 유 대인들을 살게 하므로서 사실상의 거대한 감옥생활을 시켰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들 의 이러한 부당한 조치는 수세기 후에 버러질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가능케 하는 토양을 만 드는 것이엿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을 무조건 말살시키려는 것은 아니였다.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고집하 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들의 생존권을 인정해 준다고 권면하기도 했다. 유대인들 중 에는 상당수가 이 약속에 따라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런데, 유대인의 개종은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 자체를 바꾸어 야 하는 것이였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르구엔자(verguenza: 수치라는 뜻)라는 회개의식을 치루어야 했다. 그 의식은 남녀 구별없이 머리를 삭발하고 허 리까지 옷을 벗은채 맨발로 사제들의 인도에 따라 거리를 행진하면서 구경꾼들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6주간의 회개의식이 끝나면 유대인들은 자기 재산의 5분의 1을 구제헌금으 로 교회에 바쳐야 했다. 그런후에 그들은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세례받기전에 미리 작성 된 고백서를 읽으며 그들의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그 고백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 과 같다.


"...나는 더러운 유대적 미신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내가 중독 되어 있던 유대적 관습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더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 다. 나는 다른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끈을 것이며 기독교인들만 나의 친구로 삼을 것입니 다." 유대인에게 세례는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완전히 배신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의 눈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가장 극악한 민족배신자로 보였다.


교회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카톨릭유대인(마라노스 :Marranos), 콘베르소스 (Conversos) 또는 "새로운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유대적 관습과 유대적 생활 양식을 보이는지 여부를 끝임없이 감시 하였으며, 만일 유대적 혐의가 드러나면 종교재판 에 회부하여 혐의가 확인되면 시가로 끌고다니며 수모를 격게한 후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에 처했다. 교회는 유대인들을 교회로 받아 드린후에도 이들이 교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차별하고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종교재판은 모든 기독교국가에서 12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도록 계속되엇는데, 스페인 에서 유대인에게 가해진 종교재판은 매우 가혹한 것이였다. 자료에 따르면 15세기부터 1808년에 이르기 까지 스페인에서 3만명의 마라노스들이 화형을 당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 고, 그 외에도 1492년에는 세례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재산을 몰수 당한채 국외로 추방당한 기록이 있다.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추방 당할때 마다 박해를 피하여 정처없이 떠나야 했다. 결국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박해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기독교 를 거부하게 만들었고, 기독교가없는 땅을 찾아 헤메게 하였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지구 의 동서남북으로 흐터지게 되엇다.


15세기에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카톨릭교회와 결별을 할때, 예수님도 유대인으 로 태어나셨던 사실을 강조 하면서, 유대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유대인들을 기독교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 들은 유대인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었다.....내가 만일 유대인이라도 그 어리석은 기독교지 도자들이 이끄는 기독교인이 되는것 보다는 차라리 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을 사람이라기 보다 개처럼 취급했다."


1523년 이와같이 말했던 마틴루터도 20년 후에는 유대인에 대한 생각이 180도로 달라졌 다. 늙고 병든 마틴루터가 그의 생애를 바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이 받 아 드리지 않고,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모욕적인 글을 쓰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노하 여,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같이 저주받고 버림받은 유대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을 던지면서,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그들의 회당은 불태워져야 한다...둘째, 그들의 집도 부수고 파괴되어야 한다...셋째, 그들의 기도책과 탈무드를 압수해야 한다....넷째, 그들의 랍비들이 더이상 기르치지 못하 도록 햐야 하며 이를 어길때는 사형에 처하도록 해야 한다....다섯째, 유대인들에게는 여행 증서를 발급하지 말아야 하며, 여행할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여섯째, 그들의 고리대금업 을 금지시켜야 한다....일곱째, 유대인 젊은이들에게는 땀흘려 일해야 먹을 수 있도록 노동 을 시켜야 한다....우리는 이 사악하고 게으른 자들을 우리 사회에서 쫒아내야 한다. ....그리 하여 그들을 없애버려야 한다....요건대, 자기영지안에 유대인들이 있는 친애하는 군주들 과 귀족들이여, 만일 나의 제안이 마당치 않게 여겨지거든 이 상종못할 사탄같은 짐스러운 존재인 유대인들을 없앨 수 있는 더 좋은 방안을 찾아보시오."


마틴루터의 유대인에 대한 이같은 제안은 카톨릭교회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조금도 다를바 없다. 결국 기독교는 신 구교 모두 유대인에 대한 적극적인 가해자들이 였다. 마틴 루터의 제안은 훗날 독일의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이르킬 수 있는 론리적 근거로 사용되 기도 했다.
서유럽 기독교국가들의 박해를 피하여 유대인들은 동유럽으로 이주해 갔다. 유대인들 은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폴란드 여러 지역과 루마니아와 동구유럽 여러지역에 유대 인 공동체를 이루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나 라들을 정복하기 시작 하면서 유대인의 고난은 다시 시작되었다. 정복자 러시아인들은 수 백만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있는 유대인들을 짐스럽게 느끼게 되었고, 이들에대한 말살정 책을 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은 3분의 1은 개종시키고, 3분의 1은 다른곳으로 이주 시키며, 나머지 3분의 1은 굶겨 죽이는 것이였다. 러시아어로 포그롬 (pogrom)은 대학살(파괴)를 의미하는 말로서,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졌다. 이 와같은 러시아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1881부터 1921년 기간 계속 되었고, 이같은 박해 를 피하여 유대인들은 다시 서유럽으로 옮겨갔지만 그것은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재앙속 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다.

참고문헌
*Richard Booker. "How the Cross became a sword" Salem publishing. 1998.9.20. *Michael l. Brown. "Our hands are stained with blood" Destiny Image Publishers Shippensburg,PA.U.S.A.
http://www.kibi.or.kr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변화된 것들 분류없음2009-05-11 17:21:33

0 교회가 예배중심에서 교회건물 중심으로

로마국교 이전의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는 성도들이 모인 예배공동체 였다. 그러나 로마 국교가 된 교회는 교회건물이 중심이 되었다. 초대교회생활의 중심은 가정교회였다. 지역 교회들은 매주마다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나누었다. 큰규모의 집회도 정기적 으로 모이기는 했지만 가정교회가 교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 시킨후 그는 로마에 성 요한 라테란(St. John Lateran)교회를 건립했다. 교회건물은 바실리카(Basilica) 양식으로 지어 졌는데, 그 내부 구조는 황제의 궁전 왕좌의 구조로 지어졌다. 이와같은 교회건물은 로마 전역에 건립되었 고 콘스탄티누스는 "기도의 집"을 폐지시키고 크리스챤들이 집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율을 제정 시행했다. 그 법령은 카톨릭교회가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예배하 는 것을 금지 하였다. 교회의 개념이 예배중심에서 건물중심으로 바껴버린 것이다.

0 성령의 인도함을 받던 예배가 의식을 따라하는 예배로

초대교회 예배는 성령의 임재와 기뿜과 친밀감이 있었고 정해진 예배형태나 의식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가 드려졌고, 예배중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신유의 은사 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국교가 된 교회 예배는 정해진 교회건물에서 엄숙한 공공의식이 되 었다. 예배의 순서가 명문화 되어 고정된 형식의 예배로 바뀌었고 향을 피으며 촛대를 놓 는 일들이 예배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기뻐뛰며 춤추며 부르던 찬 송도 사라졌고 그대신 로마 궁중의식에서 행해지던 엄숙한 분위기에서 별도로 조직된 성가 대에 의해서 찬송이 불려졌다.

0 초대교회에 있던 유대적 요소들을 제거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유대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고, 이들은 유대인의 풍습 을 지키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전해받은 이방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유대인들과 예배공동체로서 생활해 왔다. 그러나 태양신 숭배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기독 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내에 있는 유대적 요소는 물론 유대인 자체를 미워 했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각 교회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교회가 유대적 풍 습을 따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와같은 황제의 뜻에 따라 각 교 회들은 유대적 요소들을 교회내에서 제거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안디옥 공의회(AD.345) "만약 이 결의후에 감히 유대인들 처럼 유월절을 준수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주교건, 또는 부제건간에 공의회 판사들은 그들을 교회로 부터 파문시키고, 저 주(아나테마)할 것이다. 이 공의회는 그들의 지위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감히 그들과 연락 을 취하려는 자들도 모두 그 지위를 박탈 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공의회(AD.365) " 유대인들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 며, 그들과 함께 만찬을 주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신조 37항). 크리스챤들은 안식일 에 쉼으로서 유대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 날에 일을 해야 한다...그러나 누구라도 유 대주의자 라는것이 발견되면 그자를 그리스도로 부터 파문시키고 저주할 것이다."

프랑스 아그드 공의회(AD.506) "성직자들은 유대인들의 잔치에 참가해서는 안된다."

-제10차 톨레도 공의회(7세기경) "부활절은 한결같이 지켜저야 한다."(유월절이 아닌 니케 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날에)

-제2차 니케아 고의회(AD.787) "공공연하게 혹은 비밀스럽게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는 자들은 영성체에도, 기도에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받아드려져서는 안될 것 이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내에서 유대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같은 노력을 하였음 에도 7세기에 이르도록 교회평의회에서 여전히 유대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결의를 하는 것 을 보면, 그 때까지도 교회내에 유대적 영향이 남아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0 기독교가 이교와 혼합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신 미트라에게 기도하던중 십자가의 환상을 본 그는 예수님이 분 명 미트라의 화신이라고 생각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독교로 개종 하였음에도 태양숭배 사상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AD321년 크리스챤들이 예배하는 날을 로마의 공휴일로 정했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그 날 을 주일이라 부르지 않고, "태양의 숭엄한 날"이라고 불렀다.(그로부터 오늘의 sunday란 단어가 나왔다)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기독교가 이교와 혼합되는데 지대한 영 향을 미쳤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가르침에 따라 절기를 지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누 스 치하의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 축제일을 기독교 절기로 지켰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 의 탄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오래전 부터 12월 25일을 미트라(태양신) 탄생일로 축하해 왔다. 예수님이 미트라의 화신이라고 생각한 콘스탄티누스는 12월 25일 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선포하고 축하하게 하였다.

교회가 유월절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콘스탄티누스에게는 거스리는 것이였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축전을 불법화 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춘분 점 이후의 첫보름달이 뜨는 주간의 일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지시 했는데, 그것은 로마 가 지키는 봄의 풍요의 제전으로 지키는 기간이였다. 로마인들은 풍요의 여신을 위한 축제 를 매년 벌렸는데, 가나안인들은 이여신의 이름을 "아세라"라고 불렀고, 페르시아인들 은 "이스타르테", 바벨론인들은 "이슈타르"라고 불렀다. 고대 브리튼인들은 "이스터"라고 불 렀다. 풍요의 여신 이스터의 상징은 달걀이였다. 고대 이교도들은 달걀로 장식을 하고 이 축제를 기념하는 뜻에서 달걀을 선물로 주곤 했다. 니케아 공의회가 성경적 근거로 지켜졌 던 예수님의 부활기념 축제를 이교여신의 축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어권 국가에서는 부활절을 지금도 이스터데이(Easster day)라고 부르 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절을 이교여신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 여러분은 이해 가 되는가?!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가 됨으로써 이교 신전들은 교회건물로 바 뀌고, 이교 성소들은 기독교 성소가 되었다. 심지어 이교 사제들도 이름만 바꾼 기독교 사 제로 되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위대한 처녀" "신의 어머니"로 불렸는데, 이 여신의 상징물은 그 녀의 아들 호루스를 안고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캐톨릭교회의 마리아와 예수님의 그림 과 같지 않은가? 이시스의 숭배자들은 이시스를 마리아라고 부르며 이시스를 합법적으로 숭배할 수 있었다. 다른 이교 숭배자들도 기독교 성인과 순교자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그들 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기독교적 이름으로 바꾼뒤 합법적으로 이교 숭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는 이교와 혼합 되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교회내 상당수의 지도자 들이 기독교 신앙보다 이교신앙을 가진자들이 더 많아 지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은 오히려 제국주의 적으로 몰려 박해를 받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겉모양은 기 독교 였으나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 이들중에 진실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울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성경은 일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여저서, 읽을 수 없도록 강대상에 몪여 있 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로마국교가 된 기독교는 살아서 움직이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침묵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교회에게 주신 풍부한 기독교적 유산을 잃 어버리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은 이렇게 잃어버린 초대기독교 유산들을 얼마나 찾 았고, 회복시키고 있는가?!

- 김목훈-


(이 글은 Robert D. Heidler의 "The Messianic Church Arising"과 유재덕의 "기독교 역사"중에서 선별하여 나의 견해와 독후감과 함께 쓴 글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의 성립과 분열 그 상황속에서의 유대의 상황 (2) 분류없음2009-04-27 19:16:54
2. 종 교
헬레니즘 시대에도 올림푸스의 신(神)들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체로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그리스의 다신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로 미약해 졌고 밀의 종교(密儀宗敎)가 활기를 띄게 되었는데 이들은 구속(球贖)과 영생을 약속하였다.

a 밀의 종교
비밀의식에 참여함으로 개인의 심령이 구제 된다고 하는 소위 밀의 종교(密議宗敎, Mystery Religion)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리나 의식이 고대 신화(神話)에 기초한 밀의 종교(密議宗敎)는 그들의 입회 의식에서 개종자에게 정죄와 정결의 관념을 일깨워 주었다. 밀의 종교(密議宗敎)는 정교한 의식의 순서와 윤리의 규범을 만들었고 신실한 신도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불멸의 보상을 약속했다. 데메테르(Demeter)신(神), 디오니수스(Dionisus)신(神)등의 그리스 적인 밀의 종교가 아직도 일부에서 신봉되오고 있었으나 동방에서 들어온 밀의 종교(密議宗敎)가 점점 그 세력을 확장 하였다.




C 헬레니즘 세계하의 유대

1. 프톨레미(Ptolemy)왕조 시대의 유대
알렉산더 대왕의 별세(別世)한 후 그의 장군들에 의하여 광대한 영토는 분할 통치 되었다. 주전 323-301년 사이에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왕조 두 나라는 팔레스틴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계속하여 이 지역은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B.C 301년의 입수스(Ipsus)전투 이후 B.C 198년까지 팔레스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프톨레미 치세중 유대인들은 대채로 그들의 종교화 문화적 전통을 지키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 유대인의 통치는 유대의 제사장에게 위임되었다. 프톨레미왕조는 예루살렘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나 총독을 두지는 않았다. 내적(內的)인 행정은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져서 대제사장의 지도하에 제사장과 평신도로 구성된 장로회의(Council of Elders)가 주장하였다.
 
프톨레미왕조 지배기간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예루살렘 제사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혈통적인 혼합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불결하다고 간주되어 성전의 재건이나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북부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인 베델, 길갈, 실로, 세겜 등지를 방문하였다. 토착 사마리아 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세겜의 옛 성소 가까이에 있는 그리심산 위에 새로운 제사의 터를 세웠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6
.
유대지역 즉 예루살렘시나 유대인이 거주하는 인접 지역은 그리스화한 헬레니즘 도시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상당수의 그리스인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거주 했는데 점점 그리스화 되었다. 이러한 연안도시는 아플로니아(Apollonia),욥바(Joppa), 아조터스(Azotus),가자(Gaza)등이 있으며 사마리아 지역도 사마리아시(市)와 스키도 폴리스(Scythopolis)에 상당수의 그리스인이 살고 있었다. 에집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 하였다. 에집트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자의(自意)로 알렉산드리아, 아리스노우, 헤르모폴리스, 에드프 등지의 나머지 백성과 떨어진 특별한 구역에 살았다. 그러나 에집트 정부에서 그들을 강제로 따로 격리시키는 일은 없었다. 시민의 권리면에서도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마케도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2. 셀류커스(Seleucus)왕조시대의 유대
에굽의 플레토미가(家)와 시리아의 셀류커가(家)의 수많은 전투가 있은 후 유대 지역은 드디어 플레토미가의 통치를 떠나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즉 B.C 198년 셀류커스가의 안티오쿠스3세가 에집트인들과 싸워 승리하고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3세는 페르시아 제국때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특권들을 다시 그들에게 부여하고 성전 제사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며 성전수리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정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B.C 190년 소아시아의 미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쿠스3세가 로마군에게 패함으로써 셀류커스왕조의 쇠퇴가 시작되었고 B.C 188년 그가 죽자 유대 역사상 문제가 많은 시기가 도래 하였다.
안티오쿠스3세의 사후(死後) 왕위 쟁탈전 끝에 안티오쿠스4세가 왕좌를 차지 하였다.그는 헬레니즘 찬양자로서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헬레니즘화 하려고 결심 하였다. 이 시기에 셀류커스왕조는 외부로부터의 심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에서 셀류커스왕조는 재정적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낀 안티오쿠스4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직을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 결과 대제사장들이 자주 갈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4세의 통치 초기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3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들은 오니아스를 배척하고 그의 동생 야손을 지지 하였다. 야손은 왕에게 더 많은 조공을 약속함으로서 대제사장으로 지명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대제사장직은 행정직인 동시에 유대의 최고의 성직(聖職)이었는데, 그와 같은 최고의 성직의 매매(賣買)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 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야손은 헬라 파 유대인들의 협조로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세우고 유대 소년을 헬라 관습에 따라 나체로 운동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풍조에 대하여 하시딤(Hasidim, 경건한자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40

. 야손의 가까운 조력자인 메네라우스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안티오쿠스에게 야손보다 더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 야손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 하시딤은 자격 없는 메네라우스가 금전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안티오쿠스는 에집트를 복속 시킬 수 있었으나 로마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전략상 유대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폴로니우스 장군을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점령하고 대적자들을 학살 하였으며 요세 아크라를 건설하고 군부대를 주둔 시켰다(B.C 167).할레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는 것 성경소유 등이 금지되었다. 메네라우스는 계속 대제사장으로 있었으나 이제 그는 야웨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곳에서 쥬티퍼를 섬기게 되었다.




D 마카비 전쟁과 유대통치
1. 마카비 독립전쟁
아티오쿠스4세의 유대교 박해는 많은 순교자를 냈었다. 그는 특히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학살함으로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 저항도 없이 순교해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도 경건한 하시딤외에 율법에 충실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루살렘 북서쪽 마데인(Modein) 마을의 제사장 마타디아는 왕의 관리로부터 이방의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자 거부 하였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이 앞으로 나와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는 이것을보고 분노하여 왕의 관리를 죽이고 제사 드리는 자도 죽였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마타디아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뭉쳤고 하시딤도 그들에게 동조하였다.
 
마타디아가 죽자 (B.C 166) 마카비라 불리우는 그의 세째아들 유다가 저항 운동을 지휘하게 되었다. 매우 유능하고 과감한 유다는 저항운동을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 성공적으로 싸웠다. 이 유대인의 투쟁은 그의 별명에 따라 마카비 전쟁이라고 불리운다.
셀류커스왕조에서는 그들의 반란초기에 과소평가하여 하급 장군들에게 분견대를 보내었으나 마카비는 유격전으로 계속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고 이에 심각성을 인식 했을 때에도 안티오쿠스 당시 파르디아의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유대에 보낼 수 없었다.

이후 상당수의 시리아 군대가 유대에 파견되었으나 엠마오에서 유대의 마카비에게 대패하게 되었고 마카비는 승전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대제사장인 메네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주하였다. B.C 164년 12월 유다 마카비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쥬티퍼의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제단을 쌓았다.

마카비는 시리아의 요세인 아크라를 공격하자 안오쿠스4세의 사망 후 실질적인 권한을 쥐게 된 리시아스가 직접 많은 군대를 끌고 진격해 왔다. 마카비는 그들에게 패하였고 그들은 권력투쟁의 문제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화해를 제의해 왔다. 유다 마카비는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의 획득도 목표로 하였으나 하시딤의 목적은 종교적 자유의 획득에 있었다. 결국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던 하시딤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과 계속적인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전쟁을 해 나갔다. 결국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 하였다가 B.C 막강한 시리아 군대에 의해 B.C160년 사망하였다.



2. 하스몬왕조
유다 마카비의 전사후에 그의 동생 요나단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시리아군은 여러 차례 요나단의 유대 저항세력과 싸웠으나 그들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다. B.C 153년 알렉산더 발라스가 안티오쿠스4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데메트리우스1세를 대적하였다. 권력투쟁에서 양자는 다같이 유대인의 도움을 청했는데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대한 답례로 발라스는 요나단을 대제사장 및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왕권과 제사장권한은 한사람에게 통합되었고 마치 옛날의 신정정치가 부활되는 듯 하였다. 요나단이 시리아 장군에 의해 살해된후 그의 현제인 시몬이 그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 당시 시리아는 또다시 내분 상태에 빠졌다. 이네 시몬은 데메트리우스를 지지함으로써 데메트리우스는 유대인들에게서 받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유대 국민들과 사재는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와 대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결정 하였다.이러한 결의에 의해 하스몬왕조가 합법화 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B.C 134년 프톨레메호에 의해 살해되었고 두 아들마저 죽을뻔 했으나 요한만이 살아남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요한힐카누스1세라는 칭호로 시몬의 뒤를 이었다. 몇 개월후 프톨레미호의 요청에 의해 안티오쿠스7세는 그의 지배권을 재확인 하기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요한힐카누스는 항복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의 자치권을 보장 했지만 예루살렘의 요세를 헐어버리고 시리아에 조공을 받치게 하였다.

마카비 일가는 마카비시대 초기에 하시딤과의 동맹을 맺었었다. 그러나 요나단의 통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두개당파와 바리세당 그리고 에세네파등 세 당파가 있어 이들과 관계를 가졌다. 처음에 힐카누스는 바리세파와 좋은 관계를 가졌으나 그들 중에서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들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게 되었다.

B.C 104년 힐카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가 권좌에 올라 일년간 다스렸다. 힐카누스는 자신의 아내가 여왕이 되는 것을 원하였으나 아리스토불루스가 권력을 빼앗았다.그는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고 자신의 동생들은 투옥시키고 한 동생은 암살했다. B.C 103년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그의 처가 세 동생을 석방 시켰다. 그녀는 그중 큰 형제인 알렉산더얀네우스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히고 그와 결혼 하였다. 얀네우스는 하스몬가에서 최초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특히 바리세파와 분쟁하였다.

백성들은 바리세파의 편에 서 있었으며 시리아의 원조를 받아 얀네우스와 싸웠기 때문에 얀네우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는 바리세인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여 800명의 바리세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그들의 처자를 살해 하였다. 얀네우스의 사후 그의처 알렉산드라는 권자를 이어받고 대제사장직을 그의 맏아들 힐카누스2세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라는 죽은 남편의 충고에 따라 바리세파와 화해하였다. 알렉산드라가 죽은 다음(B.C 67년) 그녀의 아들인 힐카누스와 아리스도불루스와 권력문제로 싸우게 되었고 이 싸움을 이용하여 로마는 유대를 쉽게 정복하게 되었다(B.C 63년).




結 論

지금까지 헬라의 성립에서 시작하여 하스몬왕조의 몰락까지의 유대역사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 가있었다. 특히 헬레니즘세계는 당시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와 역사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헬레니즘의 동서 융합정책으로 유대인들은 헬라군이되어 다른 지역에 이주하게 되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사 드리기 위하여 서로 특별한 곳에 모여 살게 되었으며 프톨레미왕조하의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히브리 성경을 당시의 세계 공통어인 헬라어로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70인경이다. 또한 언어적 통일로 로마시대에도 헬라어를 사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상이 쉽게 전파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물론 로마시대의 잘 닦여진 도로의 덕분도 있었지만 언어의 통일이야 말로 기독교 전파의 견인차적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유대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통치 때 유대인과 사마리아의 분리가 있었고 셀류커스왕조의 시대에는 대제사장직이 매매되기도 하였으며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안티오쿠스4세의 박해는 가장 심한 박해였다. 이에 마카비전쟁이 시작되었고 유대는 하스몬왕조를 성립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가운데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려고 애를 섰으며 한 때는 쥬티퍼가 섬겨지던 그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려고 힘을 썼다. 이러한 가운대 메시아 대망(大望)사상은 싹이 텄으며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였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리스도 대망사상이 없었다면 예수의 부활 후 그리스도의 전파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유대는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 헬라제국 프톨레미왕조 셀류커스왕조 헤롯가의 억압속에서 메시아 대망사상을 키워 왔으며 예수그리스도이후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기독교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타민족의 지배하 에서도 유대민족은 하나님과의 율법을 지키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마카비등 경건주의 자들에 의하여 유대가 하나님은 섬기기 위한 투쟁을 보았을 때 현재 우리의 현실속에 세상의 많은 문화와 세상풍조가 믿는 자들을 구속 시킬 때 우리의 모습은 경건한 자들로서 마카비와 같은 용기를 내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KL&qid=2fk1g&q=%C0%AF%B4%EB+%BF%AA%BB%E7&srchid=NKS2fk1g
이스라엘에서 꼭 가봐야 할 10곳 분류없음2009-04-25 11:42:36

언론 선정 톱10 가운데 로시, 악고, 바하이 사원은 찾지 않아
성묘(聖墓)교회와 사해, 갈릴리 호수,악고, 로시 하니크라, 하이파의 바하이 사원, 에일랏, 마사다, 바냐스, 욥바 항구

 
 

성지순례단의 필수 방문지 예루살렘 성묘교회
너머로 보이는 시가지.

여행지로서 중동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일까. 신비함? 미지의 세계?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명저 ‘오리엔탈리즘’에서 비판했듯, 관능적이고 탐미주의적인 ‘신비함’은 서구인이 만들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중동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우리에게 그곳은 ‘아라비안나이트’‘신밧드의 모험’ 같은 소설이나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한 신비한 나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중동에 덧입혀진 이미지는 피의 복수, 갈등, 분쟁, 테러 등의 혼란과 비합리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 중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갈등과 유혈분쟁의 중심에는 늘 이스라엘이 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3대 산업 가운데 하나가 관광업이란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서 죽고 죽이는 ‘피의 잔치’가 벌어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관광객이 유람을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관광대국의 위상을
가지는 데 큰 몫을 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인 방문객 대부분 성지순례

이스라엘 통계청에 따르면, 2006년 이스라엘을 방문한 한국인은 2만8000명으로 전체 국가 중 11위
를 차지했다.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과 중국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독보적인 위상이다. 게다가 올해
는 상반기에만 2만명 이상이 이스라엘을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인 방문객이 많은 이유는 역시
 1000만명에 달하는 한국의 기독교인 덕분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승천에 이르는 사역의 현장을 직
접 보고자 하는 종교적 열심에서 성지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남한 면적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다채로운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사막과 습지가
 함께 있고 강, 바다, 호수가 있으며 8월이나 돼야 눈이 완전히 녹는 높은 산이 있다. 또 북부 산지
에서 스키를 즐길 때 남부 지역에선 해수욕을 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단위면적당 서식하는 동·
식물군의 개체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성지순례객은 기독교와
관련된 극히 제한된 장소만을 방문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 ‘하아레츠’는 최근 이스라엘에서 꼭 가봐야 할 10곳을 선정했다. 그중 한국
 성지순례객이 반드시 방문하는 장소는 3곳에 불과하다. 수차례 성지순례를 해도 결코 방문하지 않
는 장소가 3곳이며, 나머지 4곳은 일정에 따라 방문하기도 하는 장소다. 물론 여행의 감흥이란 주관
적인 것이라 이스라엘 사람 중에도 이 10곳에 동의하지 않는 이가 있겠지만, 이스라엘 여행을 계획
하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호수인데도 몸이 뜨는
현상으로 유명한 사해.

한국 성지순례객이 반드시 방문하는 3곳은 예루살렘에 자리한 성묘(聖墓)교회와 사해, 갈릴리 호수다. 성묘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 위의 교회로, 예수 무덤이 있기 때문에 성묘교회 혹은 예수 무덤교회라고도 불린다. 사해는 호수이면서도 몸이 물에 둥둥 뜨는 신기한 현상으로 유명해 방문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다.

 

반면 악고, 로시 하니크라, 하이파의 바하이 사원은 결코 방문하지 않는 3곳에 해당한다. 그중 지중해변에 위치한 십자군 성채의 위용을 자랑하는 악고는 과거 이스라엘 순례 일정이 일주일 이상 되던 때는 방문하기도 했으나 3박4일, 4박5일이 대세인 요즘의 일정에선 빠진 곳이다.
기암절벽으로 유명한 로시 하니크라는 이스라엘에서 수년간 생활한 교민들도 가보지 않은 이가
많은 곳이다. 바하이 사원은 100명 넘는 정원사들이 관리하는 정원이 유명하다.

 

9월25일부터 한-이스라엘 직항편 신설

성지순례객들의
3대 기피지인 로시
하니크라, 악고,
바하이 사원의
정원(위부터).
일정에 따라 종종 방문하기도 하는 4곳은 에일랏, 마사다, 바냐스, 욥바 항구다. 그중 에일랏은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변에 위치한 도시로, 홍해의 푸른 바다색과 산호초가 유명하다. 한국 성지순례객들이 따로 방문하지 않는 장소다. 로마에 항거하던 960명의 유대인이 자결로 최후를 맞이한 이스라엘 민족정신의 성지 마사다는 개신교도들은 대부분 방문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잘 방문하지 않는다. 우리 성경에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언급된 바냐스는 이스라엘에서는 드물게 우거진 수풀과 맑은 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진 장소이기에 4박 이상의 일정에 포함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중 하나인 욥바 항구의 경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구약성경 요나 이야기의 무대이자, 베드로 사도와 관련된 곳이기에 역시 일정이 길 때 방문할 수 있는 장소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려는 이들에게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한국-이스라엘 대한항공 직항이 주 3회 운항한다는 점이다 비행시간이 10~12시간으로 대폭 단축됐다.


이스라엘 현지에서 여행업을 하는 동시에 한인회장이기도 한 양달선 씨는 “직항이 취항해 양국 간 교류가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예처럼 막무가내식 선교활동이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가장 종교분쟁이 심한 곳이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대교, 아랍인 대부분이 신봉하는 이슬람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기독교 간의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현지상황을 잘 알지 못한 채 단기선교 등의 형식으로 들쑤셔놓고 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현지 교민 몫이라는 우려다. 양씨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진 않지만 도처에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안전을 위해 현지 사정에 정통한 안내자의 지침
을 따라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http://blog.daum.net/yoont3/11296625?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yoont3%2F11296625

   (끝)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Copyright ⓒ 유다. All rights reserved.